문경새재(鳥嶺)는 조선초(朝鮮初)에 개척(開拓)하여 영남에서 소백산맥의 준령을 넘어 한양으로 가는 주요 도로의 하나로서 조령천 양안(兩岸)의 주흘산(1,106m), 부봉(915m), 조령산(1,025m) 등이 이루는 장장 8km여의 험준한 계곡은 천험의 요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천연적 지형을 이용하여 요새(要塞)에 구축한 3개의 관문과 부속성이 1966년 3월 21일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에서 신립장군(申砬將軍)이 탄금대의 배수진으로 패망(敗亡)하자 조령로를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방비가 없음을 한탄하여 그 이듬해인 1593년 6월에 설관(說關)의 논의가 있었으나 전란 중의 경제사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갑론을박(甲論乙駁)으로 시일만 지연하다가 그 이듬해인 선조 27년에 도면이 완성되어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충주인 수문장(守門將) 출신의 신충원(申忠元)이 이미 조령(鳥嶺)에 머물면서 단독으로라도 설관태세를 갖추고 일에 착수하였으며 그는 설관 후에 파수하는 계책까지도 마련하였는데 이때에 비로소 응암 북쪽에 중성(中城)을 쌓았다.
그 후 1708년(숙종 34년)에 중성(조곡관)을 크게 중창(重創)하는 한편 이보다 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주흘관에 남적(南賊)을 막기 위한 초곡성(草谷城)을, 또 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조령관(鳥嶺關)에 북적(北狄)을 막기 위한 조령산성을 각각 축조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주흘관과 조령관이다.
이들 관문은 양쪽 산의 골짜기에 위치하여 관문 좌우 성벽은 산능선을 따라 쌓고 높이 솟은 봉우리의 6분선 쯤에서 끝났다가 다음 골짜기로 이어져 초곡, 중성, 조령산성은 계속되고 있다. 그 길이는 18리 19,509보에 이른다고 한다.
제1관문: 진안리에서 북으로 4km쯤 가면 상초리에 그 웅장한 모습을 나타내는데 육축(陸築)에는 홍예문을 내고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다. 제 1관문은 3개의 관문 중 가장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유일한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협문 2개의 팔작 지붕으로 홍예문 높이 3.6m, 두께 11cm이다. 좌우 석성의 높이는 4.35m, 폭 3.4m, 길이 188m이며 부속산성의 높이는 1~3m, 폭 2~4m로 길이는 동축이 500m, 서축이 400m이다.
제2관문 : 육축만 남기고 홍예문은 불 타버린 것을 1975년 석성과 누각을 복원하였는데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좌우 협문에 팔작 지붕이고 홍예문은 높이 3.6m, 폭 3.3m, 길이 5.8m이고 좌우성의 높이 4.5m, 폭 3.3m로 길이는 동축 400m, 서축 100m, 대문은 높이 3.6m, 폭 3.56m, 두께 11cm이다.
제3관문: 역시 1976년 석성 및 누각을 복원하였는데 누각은 정면 3칸, 축면 2칸, 좌우 협문 2개인 팔작지붕으로 홍예문 높이 3.88m, 높이 2.98m, 길이 6.12m이며 좌우성 높이 4.5m, 폭 3.24m, 길이 185m이고 부속산성 높이 2~3m, 폭 2~3m, 길이 동축 400m, 서축 400m 정도이며 대문은 높이 3.9m, 폭 3.56m, 두께 19cm이다.
이들 관문과 관련하여 이 일대에는 조령원, 동화원 등의 원터와 진(鎭)터, 신·구임(新·舊任) 경상감사가 교체할 때 교인(交印)하였다는 교귀정지와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였을 때 행궁(行宮)이 있었다는 어류동 등 사적지가 많고 또 신라 때 창건한 고찰 혜국사는 주흘산 기슭에 있다.
또한 조령천 계곡에는 여궁폭포, 쌍룡폭포, 팔왕폭포 등의 폭포가 있어 울창한 수목과 더불어 웅장함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주흘산 및 관문 일원이 1974년 12월 지방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고, 1981년 6월에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사적 및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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